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님
2011년 사망하셨고 많은 일화, 대한민국의 성장기를 함께하셨고, 또 한국의 대기업인 포스코가 자리잡기까지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박태준은 1945년, 19살이 되던 해에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이 해방되어 곧바로 귀국하였고, 1948년 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탄도학 교관 박정희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소위로 임관하며 1950년 채 24살이 안된 나이로 한국전쟁을 거치게 됩니다. 한국전쟁의 이후로는 여러 자리를 거쳐 국방부 인사과장, 사단장을 연임하게 됩니다.
그러던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는 눈에 여겨두었던 박태준을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을 설치하고 그곳의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며, 경제분야의 최고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됩니다.
국군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하도록 하자, 박태준은 단국대학교에 편입하여 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군 생활을 이어나가며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했습니다.
군인 박태준
당시 군대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일화로 당시 부사관 이상이면 군용 모포가 집에 하나씩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박태준은 여기서 물자를 단 한번 빼서 쓴 적이 있는데, 농사 일을 하느라 손이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반창고를 감아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들어 살 던 집 주인이 박태준의 아내에게 가난하게 살지말고, 다른 군 장교들 처럼 살아 풍족하게 살라며 꾸짖기도 했습니다.
또 원리원칙주의자로서 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사병식당에서 병사들이 김치를 먹지 않자, 보급장교를 불러 고춧가루를 물에 풀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보급장교가 물에 고춧가루를 풀자 색빠진 하얀 톱밥이 보였고, 분노한 박태준은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뒤집어 씌우고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라며 심히 꾸짖었습니다.
상부에 박태준이 보고하자 단지 '납품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마무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해당 납품업자가 해당사건을 돈으로 무마하려 하자 박태준은 "죽이기 전에 당장 사라져라"며 분노했습니다. 결국 박태준은 믿을만한 납품업자를 찾아 계약을 진행해 해당 사건이 해결되었던 일화입니다.
이 원리원칙때문에 절대 병사을 개인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타 장교들이 자기과시를 위해 당번병을 늘리려고 할 때에, 개인적인 일로 절대 사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통금 시간이 정해져 있어 원리원칙을 지켜야 했던 박태준은 병든 첫째 아이를 사사로운 일에 부대 차를 부를 수 없다며 통금시간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렸으나, 이 때문에 박태준은 어쩔 수 없이 첫째 아이를 병으로 보내야 했었습니다 이후 둘째 아이도 같은 상황이 되었고, 위의 일화에서 새로 계약한 납품업자가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박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어 둘째 아들은 무사히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업인 박태준
일본어에 능통했던 박태준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고, 임무를 마치자마자 대한중석의 사장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대한중석은 텅스텐을 캐내는 국영기업으로 1960년대 초에는 국가 총수출액의 1/6을 차지하는 중요한 기업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사장으로 일하며 경영의 실제를 배우고, 만성적자이던 기업들을 흑자기업으로 돌려놓으며 기업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1965년 5월, 미국의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하고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다진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기술 회사 코퍼스(Koppers Co. Inc)의 회장을 만나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며 제안받습니다.
종합제철소 건설은 많은 국내외 기관, 기업들이 회의적으로 볼 정도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투자금을 받는 것 또한 사실상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뒤늦게 산업화 초기에 진입한 한국은 철강 자체생산이 필수 불가결했기에, 어떤 수를 써서든 제철소를 짓는 방법밖에는 없었기도 합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을 시작하지만 어느 나라를 가던지 자금원조를 거절당했고, 지급불가 입장으로서 미국에서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세계 철강업계와 국제차철차관단(KISA)의 대표에게도 퇴짜를 맞은 상황에서 절망뿐이었던 상황은 하나의 희망을 보기 시작합니다.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은 실패했지만,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방법이 있다"며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좋은 아이디어다. 대일청구권이 1억달러 남아있으니 일본정부를 설득하라" 며 답하게 됩니다.
당시 대일청구권의 자금은 농수산 지원, 즉 1차 산업 지원에 사용될 기금이었습니다. 이는 농촌 출신들의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농 수산 지원에 사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의 생각은 제철소를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박태준은 일본에 건너가 야히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야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며 일본정부가 제철기술을 제공하도록 설득하였고,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지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1968년 4월, 회사를 설립하며 1970년부터 건설을 시작합니다.
박태준은 이 때 유명한 어록을 남깁니다.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고 하였으며, 지금도 포스코의 도전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에 유명한 일화로 포항제철소 공사시 박태준 사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 일을 진행하였고, 직접 공사판에서 일을 하였으며, 공사부지 확보를 위해 철거할 때 반발이 심하자 직접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고다녔습니다.
포항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은 박태준 회장에게는 누구보다 큰 의미 였을 것이고, 포항제철에서 만든 철들로 경제개발의 신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초석을 닦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박태준 명예회장, 박정희 대통령
1965년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으로 지금까지 위안부, 강제징용에 대한 문제에 일본정부가 "배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굳이 포항제철을 짓지 아니했어도 모든 자금은 농수산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수교 40주년 기념 비밀문서 공개로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그래도 최대한 국익을 관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박태준 회장이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뜨며 각오한 것과 같이, 박태준 회장에게는 선조들의 피의 삯으로 지은 제철소나 다름없는 셈이었습니다.
포항제철 창립당시 세계은행 보고서에는 '한국은 철강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많은 나라들에게 원조를 받지 못했었던 과거가 있는데,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그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때와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존 자페는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것이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당신이 이 문제를 가능하게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되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1992년 10월 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고 박정희 대통령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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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박태준은 1945년, 19살이 되던 해에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조국이 해방되어 곧바로 귀국하였고, 1948년 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탄도학 교관 박정희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소위로 임관하며 1950년 채 24살이 안된 나이로 한국전쟁을 거치게 됩니다. 한국전쟁의 이후로는 여러 자리를 거쳐 국방부 인사과장, 사단장을 연임하게 됩니다.
그러던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는 눈에 여겨두었던 박태준을 국가재건최고회의장을 설치하고 그곳의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며, 경제분야의 최고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됩니다.
국군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하도록 하자, 박태준은 단국대학교에 편입하여 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고, 군 생활을 이어나가며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했습니다.
군인 박태준
당시 군대의 비리는 심각한 수준이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일화로 당시 부사관 이상이면 군용 모포가 집에 하나씩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박태준은 여기서 물자를 단 한번 빼서 쓴 적이 있는데, 농사 일을 하느라 손이 갈라진 어머니의 손에 반창고를 감아드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들어 살 던 집 주인이 박태준의 아내에게 가난하게 살지말고, 다른 군 장교들 처럼 살아 풍족하게 살라며 꾸짖기도 했습니다.
또 원리원칙주의자로서 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사병식당에서 병사들이 김치를 먹지 않자, 보급장교를 불러 고춧가루를 물에 풀어보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보급장교가 물에 고춧가루를 풀자 색빠진 하얀 톱밥이 보였고, 분노한 박태준은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뒤집어 씌우고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 라며 심히 꾸짖었습니다.
상부에 박태준이 보고하자 단지 '납품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마무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해당 납품업자가 해당사건을 돈으로 무마하려 하자 박태준은 "죽이기 전에 당장 사라져라"며 분노했습니다. 결국 박태준은 믿을만한 납품업자를 찾아 계약을 진행해 해당 사건이 해결되었던 일화입니다.
이 원리원칙때문에 절대 병사을 개인적으로 이용하지 않았고 타 장교들이 자기과시를 위해 당번병을 늘리려고 할 때에, 개인적인 일로 절대 사병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통금 시간이 정해져 있어 원리원칙을 지켜야 했던 박태준은 병든 첫째 아이를 사사로운 일에 부대 차를 부를 수 없다며 통금시간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렸으나, 이 때문에 박태준은 어쩔 수 없이 첫째 아이를 병으로 보내야 했었습니다 이후 둘째 아이도 같은 상황이 되었고, 위의 일화에서 새로 계약한 납품업자가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박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어 둘째 아들은 무사히 치료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업인 박태준
일본어에 능통했던 박태준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고, 임무를 마치자마자 대한중석의 사장으로 임명됩니다. 당시 대한중석은 텅스텐을 캐내는 국영기업으로 1960년대 초에는 국가 총수출액의 1/6을 차지하는 중요한 기업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사장으로 일하며 경영의 실제를 배우고, 만성적자이던 기업들을 흑자기업으로 돌려놓으며 기업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1965년 5월, 미국의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하고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다진 박정희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기술 회사 코퍼스(Koppers Co. Inc)의 회장을 만나 건설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며 제안받습니다.
종합제철소 건설은 많은 국내외 기관, 기업들이 회의적으로 볼 정도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투자금을 받는 것 또한 사실상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뒤늦게 산업화 초기에 진입한 한국은 철강 자체생산이 필수 불가결했기에, 어떤 수를 써서든 제철소를 짓는 방법밖에는 없었기도 합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을 시작하지만 어느 나라를 가던지 자금원조를 거절당했고, 지급불가 입장으로서 미국에서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세계 철강업계와 국제차철차관단(KISA)의 대표에게도 퇴짜를 맞은 상황에서 절망뿐이었던 상황은 하나의 희망을 보기 시작합니다.
박태준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은 실패했지만,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방법이 있다"며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좋은 아이디어다. 대일청구권이 1억달러 남아있으니 일본정부를 설득하라" 며 답하게 됩니다.
당시 대일청구권의 자금은 농수산 지원, 즉 1차 산업 지원에 사용될 기금이었습니다. 이는 농촌 출신들의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농 수산 지원에 사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의 생각은 제철소를 짓는데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박태준은 일본에 건너가 야히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 신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야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며 일본정부가 제철기술을 제공하도록 설득하였고, 신일본제철의 기술로 지어지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1968년 4월, 회사를 설립하며 1970년부터 건설을 시작합니다.
박태준은 이 때 유명한 어록을 남깁니다.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한다" 고 하였으며, 지금도 포스코의 도전정신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에 유명한 일화로 포항제철소 공사시 박태준 사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 일을 진행하였고, 직접 공사판에서 일을 하였으며, 공사부지 확보를 위해 철거할 때 반발이 심하자 직접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설득하고다녔습니다.
포항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은 박태준 회장에게는 누구보다 큰 의미 였을 것이고, 포항제철에서 만든 철들로 경제개발의 신화,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초석을 닦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박태준 명예회장, 박정희 대통령
1965년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으로 지금까지 위안부, 강제징용에 대한 문제에 일본정부가 "배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때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다시피 굳이 포항제철을 짓지 아니했어도 모든 자금은 농수산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또한 수교 40주년 기념 비밀문서 공개로 학자들이 이야기하기를 그래도 최대한 국익을 관철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박태준 회장이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뜨며 각오한 것과 같이, 박태준 회장에게는 선조들의 피의 삯으로 지은 제철소나 다름없는 셈이었습니다.
포항제철 창립당시 세계은행 보고서에는 '한국은 철강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많은 나라들에게 원조를 받지 못했었던 과거가 있는데, 포스코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그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때와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존 자페는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것이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당신이 이 문제를 가능하게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되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 드립니다."
(1992년 10월 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내 고 박정희 대통령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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